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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슈

서울의 봄 관람 후기, 12·12 쿠데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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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의 전모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집권기인 5공, 6공이 끝날 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폭압 정치로 서슬 퍼런 시절에는 그 누구도 입을 뻥끗할 수 없었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법이라, 6공 노태우 정권이 1993년 2월에 막을 내린 후 그 해 9월이 되었다.  12·12 군사반란 집압에 실패하여 패장의 멍에를 썼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장군이 [12·12 쿠데타와 나]라는 책을 내면서 부터 반역의 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후 1996년 전두환과 노태우를 반란 혐의로 구속 수사하고 법정에 세우면서 사건에 진술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였던 정승화 전 참모총장도  진술로 가세했다. 

 

반란군 수괴들은 반역의 역사를 암흑 속에 영원히 묻을 수 있다고 자신했는지 모르나, 그들의 철저한 함구에도 불구하고 17년이 지나 실체가 거의 드러났고 그들은 법의 심판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스토리 라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정치 상황은 혼란의 와중에 빠져 있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총리 최규하가 국무회의를 통해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시해범 김재규에 대한 수사는 합동수사본부가 담당하였다. 

 

합동수사본부장은 방첩과 보안 담당인 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이 맡아 수사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보력과 수사권이라는 절대권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전두환은 수사 과정에서 입수한 박정희의 비자금을 임의로 처분하고 그 결과를 상관인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대장 정승화에게 뻔뻔하고 당돌하게 보고하였다.

 

정승화 총장은 월권을 자행하는 전두환을 동해 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고 하지만, 이미 정보력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기밀이 새어 나가고 만다.

 

전두환은 이에 대응해 정승화 총장이 박대통령 시해 현장인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방조죄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 체포 계획을 세우고 강제 연행에 성공한다.

 

**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이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불린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인 박지만이 상영금지 가처분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 승소한 사례가 있었다. 

이후 상영금지 소송이 제기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현대사 관련 영화에서는 실명이 아닌 비슷한 발음의 가명을 쓰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의 봄에서도 전두환은 전두광으로 불린다. 

 

 

 

 

1. 영화의 기본 개요

 

■ 개봉일 : 2023.11.22

■  감독 : 김성수(아수라, 태양은 없다, 감기, 비트, 영어완전정복.....)

■  출연 : 정우성, 황정민, 이성민, 박해준, 김성균

■  러닝타임 : 2시간 21분

■ 제작비 : 230억

■  손익분기점 관객수: 460만명

 

2. 영화 감상 후기

 

  1) 전두환의 기만 전술

       전두환은 5공 당시 청와대 수석 등 참모진들 앞에서 자신의 특기가 군사전략이라고 발언했다고 전해진다. 작전이 주특기인지 아니면 비열한 술책이 주특기인지 알 수는 없으나, 12·12에서는 기만술을 이용해 상대를 압도하고 우세를 점한다. 

 

      ■  반대세력 유인책 : 군사반란 당일 전두환은 회식을 빌미로 반대 세력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을 연희동 연회장에 초대하여 그들이 신속히                                                대응할 수 없도록 선수를 쳐 기선을 제압했다. 

 

      ■ 신사협정 : 12·12 반란이 전두환의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이 2차에 걸쳐 전두환의                           정승화 체포수사 요구에 재가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승화 불법 연행을 육참차장 등 육군                           본부 수뇌부에서 인지하고 반란 진압을 시도하였다.

                         진압세력이 있던 용산의 육본을 잘 방어하고 반란세력을 견제하며 날이 밝았더라면 쿠데타                             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이때 육본의 출동명령을 받고 부천에 주둔했던 9공수 여단이 12일 밤 11시 40분경 출동했다.                            그리고 반란군 세력 또한 육본을 점령하기 위해 김포에 주둔했던 1공수 여단(여단장은 하나                            회 소속 박희도 준장)을 출동시켰다.

                         이때 나온 전두환의 비상한 술책이 바로 신사협정이었다.  전두환은 서울 한복판에서 공수부                           대 간의 전투로 서울시민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일단 쌍방이 부대를 철수시키자는 신사협                           정을 제안하였다.

                         진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육본 참모차장은 전두환 세력의 신사협정 제의를 받아들이고 9공                            수에게 본대복귀 명령을 다시 내렸다.

                         그렇지만 전두환은 약속을 어기고 1공수 여단이 서울에 진입하여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양 진영의 승패가 결정되고, 쿠데타가 그 날 밤에 성공하였다.     

 

 2) 군 사조직 하나회의 반란

      군 조직에서 사조직 하나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실로 경악할 만하다. 이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도 70년대       초반에 확인하고 대노하였다.  즉시 전두환이 청와대에 잡혀와 박정희의 문초를 받았다. 

      전두환은 박대통령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할 목적으로 하나회를 결성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은 5·16 혁명 당시 육사 생도의 혁명 찬성 거리행진를 주도하여 지대한 공을 세운 전력이 있어 박          정희의 총애를 받고 군조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옛말에 "모든 사람을 믿는 것은 바보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은 더 바보다"는 말이 있듯이 박정희는 전          두환을 믿기고 하고 하나회를 용인하고 말았다. 

       박정희의 인심이 결국 사후 육군조직의 명령체계를 허물고 군사정권의 12년 연장을 불러오고 말았다.  

  

   3) 국방장관의 무능력

       국방장관 노재현의 무능력이 압권이다.  4성 장군이고 합참의장 출신인 것을 알게 되면 더더욱 기가 막힌다. 영화 속 장면이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12·12  당일 총성을 듣고 도피하여 시간을 끌다가 결국 국방부 내에서 반란군 세력이었던 1공수에 붙잡혀 전두환에 협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4) 최규하 대통령의 재조명

         세밀한 역사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최규하가 신군부의 위세 앞에 바로 꼬리를 내렸을 것이라고 예단하고 만다. 이 영화는 최규하의 변명이라고 할만큼 최규하의 명예 회복에 일조했다고 본다.

      최규하는 유약하기는 하지만, 전두환의 2차에 걸친 정승화 체포수사 요구를 거절했다. 신군부의 반란 성공 후에도 거절 의사를 관철했다면 불멸의 지조를 역사에 남겼을 것이다.  

 

3. 영화관의 분위기

      최근 개봉작이고, 나름의 화제로 시선을 받고 있으며, 공교롭게도 12월 12일을 앞두고 싸늘한 한기가 한반도를 점령한 시점이 절묘하게 영화 속 상황을 현장감 있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탐욕의 화신인 전두환과 반란군이 성공하는 새드엔딩이라, 영화관의 분위기는 초상집 같았다. 또한 웃음이 나올 수 없는 현대사의 비극적 상황 앞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는 관객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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