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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슈

고려거란전쟁(3회, 4회) 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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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3회, 4회에서 강조의 정변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 졌다.

고려사에서 국왕시해 피해자 1호가 된 목종, 그는 어찌하여 피살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1. 목종 모후 천추태후의 과도한 욕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 승자인 현종의 입장에서 역사가 기록될 수밖에 없으니 어느 정도 왜곡이 있었다고 보니 제3자인 후세는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흔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역사 관련 교양서에서 읽은 것처럼 천추태후가 내연남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 현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대량원군(현종)을 암살하기 위해 각종 음모를 꾸몄을까 하는 점이다.    

천추태후 또한 왕가의 1인인데 왕씨가 아닌 김씨로 역성혁명을 도모하려고까지 했을까하는 것이 의구심으로 남는다.

역사의 패자가 되고 만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진의를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다.  


2. 목종의 진퇴양란

   목종은 효성이 지극한 효자인가? 그저 마마보이에 불과한가?

각종 한국사 시험에서  고려 목종은 토지제도 관련하여 기존의 시정 전시과를 개정 전시과로 개편한 왕으로 빈출되었기에 나름 우리에게 익숙한 왕이다.

  장성한 우에도 모후의 섭정을 상당 기간 계속 용인했다는 점에서 왕으로서 권위를 상실한 점이 아쉽다.

그리고 유행간이란 비서 역할을 하는 자와 동성애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고려가 조선에 비해 유교적 강요가 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왕으로서 존엄은 상실했다고 보여진다.  

도덕적 약점을 안고 있던 목종이 모친의 비위를 문제 삼아 김치양 세력을 내칠 수 없었던 진퇴양란이 결국 그의 파국에 쇄기를 박았다고 보여진다.


3. 강조의 진심


우리나라 역사에서 혁명에 성공한 장수의 하나다. 고래로부터 찾아보면, 연개소문, 왕건,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최충헌, 이성계, 박원종, 박정희, 전두환 등

강조는 목종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고려의 군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최고 실력자였다.

강조는 이의민과 함께 왕을 시해한 장수이지만 이의민에 비해서는 그 죄가 묻혀 있다. 역사에서 크게 부각시켜 강조를 치죄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고려 역사서가 조선조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윤리를 버러진 목종을 처단한 강조에 대해 동정심이 있는 듯하다.

강조가 거란과 싸운 통주에서 자신감을 갖고 검차를 앞세워 전면전을 감행하지만 패배해 거란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거란 성종의 귀화 회유에도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장수의 굳은 결의가 역사에서 더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그 장렬한 죽음으로 강조의 목종 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고려가 거란에 대항한 민족항전의 과정에서 장수의 불가피한 결단였던 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보여진다.

사리사욕만 채우다가 경쟁자에 의해 피살된 이의민에 비하면 강조의 삶은 나름의 목적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강조의 목종 시해는 왕씨 왕족에게는 끔찍한 슬픔이었겠지만 고려와 백성을 거란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을 것이란 추정에 한 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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